송진우의 기록에서는 시간이 먼저 보입니다
210승만큼 눈길을 붙드는 것은 그 숫자까지 이어진 긴 선수 생활입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이글스의 마운드를 지킨 송진우를 돌아봅니다.
오래 본 이름은 오래된 줄도 모르고 봅니다
야구를 보다 보면 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선수가 생깁니다. 새로운 얼굴이 들어오고 감독이 바뀌어도 그 이름은 기록표 어딘가에 있습니다. 해마다 보니 익숙해서, 그만큼 오래 선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습니다. 송진우는 제게 그런 투수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이글스의 마운드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이름입니다.
빙그레라고 부르던 시절과 한화라고 부르게 된 뒤의 시간이 한 선수의 커리어 안에 이어집니다. 팬의 일상도 그 사이에 달라졌습니다. 어릴 때 보던 야구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보고, 경기만 신경 쓰던 날에서 다른 일을 하며 점수를 확인하는 날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운드에는 여전히 아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익숙함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기록을 펼쳐야 보이기도 합니다. 송진우는 이글스에서 21시즌을 뛰었습니다. 숫자를 적고 나면 내가 막연히 오래 보았다고 느낀 데 이유가 생깁니다. 단순히 오래전 데뷔한 선수가 아니라, 여러 세대의 타자를 상대하며 실제로 그 시간을 채운 투수였습니다.
210승 옆의 숫자도 읽게 됩니다
송진우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기록은 통산 210승일 것입니다. 큰 숫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옆에 놓인 103세이브도 함께 보고 싶습니다. 한 선수의 이름에 승리와 세이브가 나란히 쌓여 있다는 것은 커리어가 한 가지 역할로만 이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경기의 시작과 끝에서 서로 다른 책임을 맡은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선발로 나서는 투수와 경기 중간에 등판을 기다리는 투수의 하루는 다를 것입니다. 팬에게는 똑같이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모습이지만 준비하는 순서와 긴장을 쓰는 방식까지 같지는 않을 겁니다. 송진우의 기록을 한 가지 보직의 잣대로만 읽으면 그 커리어의 일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1992년에는 승리와 구원 부문 타이틀을 함께 차지했습니다. 당시 구원 부문은 오늘날의 세이브 개수만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해 송진우의 25세이브포인트는 구원승 8개와 세이브 17개를 합친 기록입니다. 오래된 기록의 명칭을 정확히 읽는 일은 숫자를 줄여 말하는 일보다 조금 번거롭지만, 선수의 실제 성취를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통산 3,003이닝을 보면 또 다른 감정이 듭니다. 이닝은 한 번의 호투로 크게 늘릴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매번 아웃을 쌓고 다음 등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승리에는 타선과 수비의 몫도 있고, 세이브에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준 동료가 있습니다. 이닝까지 같이 보면 팀의 경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기 일을 맡았던 투수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젊은 투수의 시간과 베테랑의 시간
송진우의 선수 생활을 처음과 끝의 숫자만으로 연결하면 중간의 변화가 사라집니다. 1989년에 시작한 커리어가 2009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상대 타자들이 바뀌었고 팀의 구성도 달라졌습니다. 같은 구단에서 뛰었다고 언제나 같은 야구 환경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팀에 오래 남는 일에도 끊임없이 새로 적응하는 시간이 포함됩니다.
젊은 선수에게 기대하는 것과 베테랑에게 기대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는 앞으로 얼마나 좋아질지 상상하고, 나중에는 지금 가진 것으로 어떤 경기를 해 줄지 기다리게 됩니다. 팬의 기대가 바뀌는 동안에도 선수는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름이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다음 아웃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2006년 송진우가 통산 200승에 닿았다는 기록을 읽으면 그 긴 흐름이 실감납니다. 처음부터 200이라는 숫자를 약속받고 시작한 커리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다음 등판과 다음 시즌이 먼저였을 겁니다. 쌓인 숫자가 어느 날 큰 이정표가 되지만, 그 숫자까지 가는 대부분의 날은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었습니다.
21번에 담긴 여러 세대의 기억
한화의 영구결번 21번을 보며 팬들이 떠올리는 송진우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젊은 시절의 투구를 먼저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오래 버틴 베테랑의 얼굴을 떠올릴 것입니다. 같은 이름을 놓고 서로 다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긴 선수 생활이 남기는 특별한 풍경입니다.
롯데 팬인 저는 이글스 팬처럼 모든 등판을 따라간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커리어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상대 팀의 오래된 투수를 계속 만나며 생기는 익숙함은 있습니다. 오늘 선발이 누구냐는 말에 낯설지 않은 이름이 돌아오던 날들입니다. 그 이름이 어느 날 더는 선수 명단에 없다는 사실은 다른 팀 팬에게도 시대가 지나갔다는 느낌을 줍니다.
은퇴한 뒤에는 통산 기록이 멈춥니다. 선수에게 더해지던 숫자가 이제 우리가 읽는 숫자가 됩니다. 송진우의 기록은 그때부터 다른 속도로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오늘 이겼는지가 먼저였다면, 지금은 그 많은 승리 사이에 몇 번의 계절이 있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결과가 끝난 뒤에야 시간의 길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210승이라는 숫자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투수였다는 설명이면 충분할 수 있습니다. 오래 야구를 본 제게는 한 문장이 더 남습니다. 저 이름을 정말 오래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 평범한 감상이 가벼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송진우는 많은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 안에는 한 선수가 자기 자리를 오래 지킨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은퇴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송진우 — De Vincent, CC BY-SA 3.0.
- 대전 한밭야구장 — ko:User:Prister, CC BY-SA 3.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 야구 글러브의 앞면과 뒷면 — Jeremy Kemp, Public do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