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택의 안타는 한꺼번에 쌓이지 않았습니다
LG에서 이어 간 선수 생활과 2,504안타, 영구결번 33번. 박용택의 기록을 순위보다 오래 출근한 타자의 시간으로 읽어 봅니다.
잠실에서 오래 보아 온 왼손 타자
박용택을 떠올리면 잠실과 줄무늬 유니폼이 함께 생각납니다. 오래 야구를 본 사람에게는 굳이 어느 팀 선수인지 덧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익숙한 조합입니다. 2002년 LG에서 출발해 2020년까지 이어 간 선수 생활에는 구단을 옮겨 다닌 이야기가 없습니다. 같은 팀의 서로 다른 시기를 한 사람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젊고 빠른 외야수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팬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는 중요한 타석에서 안타를 기대하게 하는 베테랑의 얼굴이 더 익숙해졌습니다. 같은 선수를 오래 보면 한 장의 사진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집니다. 내 기억 속에서도 젊은 박용택과 나이 든 박용택이 서로 다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롯데를 응원하며 LG 경기를 볼 때도 그의 이름은 자주 마주쳤습니다. 꼭 극적인 홈런이 아니어도 타구가 수비 사이로 빠져나가면 흐름이 이어집니다. 상대 팬은 그 안타가 반갑지 않지만, 그렇게 여러 번 만나고 나면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익숙함이란 같은 장면을 대충 보았다는 뜻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2,504개라는 숫자를 천천히 읽는 방법
박용택은 KBO리그에서 2,504안타를 남겼습니다. 큰 숫자를 보면 먼저 순위를 찾게 되지만, 저는 이제 그 안타가 쌓인 시간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루에 몇 개씩 더하다가 어떤 날은 하나도 추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 경기에서 다시 타석에 들어서야만 늘어나는 숫자였다는 점이 마음에 남습니다.
통산 타율은 0.308이고 홈런은 213개, 도루는 313개입니다. 안타 수만 보면 놓칠 수 있는 선수의 다른 모습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담장을 넘기는 힘과 베이스를 움직이는 발이 모두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팬들이 먼저 기대하는 장점의 비중도 달라졌습니다. 한 가지 기록만으로 선수의 전부를 그리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매년 똑같이 잘한 선수였다고 기억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시즌별 타율과 안타 수를 펼쳐 보면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꾸준함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는 뜻보다는 그런 변화 속에서도 다시 타석을 얻고 기록을 이어 갔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결과를 알고 과거를 보면 모든 해가 순조로웠던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미 완성된 2,504라는 숫자를 출발점에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인 때부터 그 숫자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니까요. 작은 부진 하나를 넘기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마지막 합계가 되었습니다. 많은 안타를 친 선수라는 소개 뒤에 그 반복을 조금 더 오래 놓아 두고 싶습니다.
팀의 기다림을 함께 지나간 선수
박용택은 신인이던 2002년에 한국시리즈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현역 생활 끝까지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첫해 큰 무대를 경험한 선수가 오랜 시간을 지나며 같은 팀의 기다림을 함께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통산 성적만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승 반지가 없다는 이유로 그 선수의 커리어를 부족한 이야기로만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야구는 한 타자가 혼자 시즌을 완성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개인이 매일 해낼 수 있는 몫은 있습니다. 팀이 기대만큼 올라가지 못하는 시기에도 타석을 지키며 남긴 기록을 따로 읽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훗날 LG가 정상에 오른 장면을 보며 박용택의 이름을 함께 떠올린 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유니폼을 벗은 선수가 그 우승을 선수로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전 세대가 함께 보낸 시간이 팬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재 선수들의 성취와 과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구분하면서도 함께 간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팀에서 오래 뛴 선수를 볼 때 팀과 개인의 시간이 얼마나 다른 속도로 가는지 생각합니다. 선수의 좋은 시즌에 팀이 아쉬울 수도 있고, 팀이 더 좋아졌을 때 선수는 이미 자리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승 연도와 선수의 전성기가 겹치지 않는다고 어느 쪽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3번을 남기고 타석 밖으로
2022년 7월 3일 박용택의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이 열렸습니다. LG의 33번은 그렇게 구단이 기억하는 번호가 되었습니다. 숫자가 걸렸다는 사실은 통산 안타를 알리는 표지판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어떤 팬에게는 처음 야구장에 갔던 시절이고, 다른 팬에게는 오래 응원하던 팀을 떠나지 않은 선수의 얼굴입니다.
은퇴한 뒤의 모습을 먼저 알게 된 사람도 선수 시절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면 밖에서는 다른 표정으로 말하고 웃는 사람에게, 한때 매일 상대 투수와 승부하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은퇴는 그 시간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이제 다른 자리에서 돌아볼 수 있게 되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박용택의 기록에서 제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안타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 안타까지 가는 동안 쌓인 평범한 단타들과 다음 경기에 다시 들어선 타석입니다. 오래 남은 선수의 숫자는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잠실의 33번을 보면 저는 대단한 한 순간보다,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진 타자의 출근을 떠올리게 됩니다.
기록 참고: KBO 공식 기록 · 관련 보도 2 · 관련 보도 3
이미지 출처
- 2017년 잠실야구장의 야간 경기 — Cyberdoomslayer, CC BY-SA 4.0.
- 배트와 야구 글러브 — Matt Benson, Unsplash License.
- 2018년 잠실야구장의 외관 — Christophe95, CC BY-SA 4.0.
- 어린이병원 기금 전달식에 참석한 박용택 — LG전자, CC BY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