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완이 앉아 있던 자리
홈런을 치는 타자이면서 긴 경기 내내 투수의 공을 받던 포수. 쌍방울과 현대, SK를 거친 박경완의 야구와 인천에 남은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공을 던지는 사람 뒤에 있던 선수
어렸을 때 야구 중계를 보면 주로 투수와 타자를 따라갔다. 누가 빠른 공을 던지는지, 누가 멀리 치는지가 궁금했다. 포수는 화면에 늘 있었지만 이상하게 덜 보였다. 공을 받는 모습이 너무 당연해서였을 것이다. 야구를 오래 보고 나서야 그 당연한 자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맡고 있는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박경완은 그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선수다.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는 모습과 타석에서 배트를 돌리는 모습이 함께 기억난다. 상대 팀 팬에게는 어느 쪽도 편하지 않았다. 수비 때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포수였고, 공격 때는 한 번의 스윙을 조심해야 하는 타자였다. 타순에서 잠깐 쉬어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관중석이나 중계 화면만 보고 그의 모든 판단을 알았다는 뜻은 아니다. 포수의 사인과 투수의 생각, 벤치의 지시 가운데 팬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다. 다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선수가 있었다. 박경완은 공이 날아가기 전부터 화면 안에서 존재감을 가진 포수였다.
네 번의 타석이 남긴 긴 기억
그의 공격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날이 있다. 2000년 5월 19일, 현대 소속이던 박경완은 대전 한화전에서 KBO 리그 최초로 네 타석 연속 홈런을 쳤다. 한 경기에서 홈런 네 개라는 말도 놀랍지만, 타석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 담장을 넘겼다는 점이 먼저 마음에 걸린다. 다음 타석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나는 그날의 네 타석을 현장에서 모두 보았던 사람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지금 남은 영상과 기록으로 다시 보는 장면도 내 야구 기억의 일부다. 오래된 경기를 되돌아보는 재미는 결과를 모르는 데만 있지 않다. 결과를 알아도 그 과정이 믿기지 않는 순간이 있다. 네 번의 타석을 나란히 놓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박경완은 그해 포수로는 처음 한 시즌 40홈런을 넘기며 정규시즌 MVP가 됐다. 포수라는 자리를 함께 떠올리면 숫자가 더 무겁게 다가온다. 수비 때는 긴 시간 몸을 낮추고 공을 받다가, 공격 차례에는 다시 타자가 된다. 한쪽의 일이 끝났다고 다른 쪽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통산 314홈런은 그 하루만 반짝인 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특별한 기록은 기사의 제목이 되기 쉽지만 커리어는 그 사이의 많은 경기로 이어진다. 대단한 하루를 남긴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상대 투수에게 부담을 주는 타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하고 싶다. 박경완의 홈런은 한 장면으로 시작해 긴 시간으로 읽어야 하는 기록이다.
마스크를 쓰고 보낸 경기의 수
그는 쌍방울, 현대, SK를 거치며 선수 생활을 했다. 지금 SSG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에서 그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도 실제로 뛰었던 팀의 이름은 SK였다는 점을 구분하게 된다. 팀의 역사는 이어지지만 선수의 시간을 정확한 유니폼으로 떠올리는 일도 필요하다. 서로 다른 팀에서 쌓은 경험이 한 사람의 커리어 안에 들어 있다.
박경완의 통산 출장 기록은 2,044경기다. 그 숫자를 모두 포수 수비로만 채웠다는 뜻은 아니지만, 포수를 중심으로 긴 선수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기록 앞에서 홈런 숫자를 볼 때와 다른 생각을 한다. 잘한 장면을 얼마나 남겼는지보다, 얼마나 자주 경기를 준비하고 자기 자리에 나왔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포수의 일은 잘 보일 때보다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공을 뒤로 빠뜨리지 않은 장면은 금세 다음 투구로 넘어가고, 주자를 묶어 둔 시간은 도루 저지 장면처럼 따로 남기 어렵다. 경기의 흐름 속에 섞여 버리는 일이 많다. 그래서 포수를 볼 때는 화려한 장면만 기다리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물론 좋은 투구의 공을 전부 포수에게 돌릴 수는 없다. 실제로 공을 던지는 투수의 능력과 선택이 있고, 수비와 벤치의 역할도 있다. 박경완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주변 선수의 몫을 줄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가 투수 옆에서 함께 경기의 답을 찾던 포수였다는 정도의 표현이 좋다. 보이지 않는 일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의 무게를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에 남아 있는 26번
SK의 26번을 떠올리면 한때 강했던 팀의 경기 풍경이 함께 따라온다. 타선과 마운드에 여러 좋은 선수가 있었고, 포수 자리에는 박경완이 있었다. 그 시절의 팀을 한 사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를 빼고 떠올리기도 어렵다. 팀이 남긴 인상 속에 한 선수의 자리가 그렇게 들어가 있다.
SSG를 응원하는 어린 팬에게 박경완은 직접 뛰는 모습을 본 선수보다 먼저 들은 이름일 수도 있다. 영구결번은 그런 팬에게 질문을 남긴다. 왜 이 번호는 다른 선수가 달지 않는지, 이 사람은 어떤 야구를 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현재의 구장에서 예전의 팀과 선수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처음에는 홈런 기록부터 설명했을 것 같다. 네 타석 연속 담장을 넘겼고, 포수로 뛰면서 많은 홈런을 친 선수라고 말이다. 이제는 설명을 조금 더 붙이고 싶다. 그 타석 사이에 다시 보호 장비를 차고 앉아 공을 받던 시간이 있었다고. 공격의 장면만큼 수비의 시간도 길었던 선수라고 말이다.
박경완을 생각하면 이제 홈런 타구가 날아간 방향만 보지 않게 된다. 다음 이닝에 포수가 앉을 자리도 함께 보게 된다. 화려한 순간과 반복되는 일을 같은 커리어 안에서 보는 것, 그것이 오래 야구를 본 팬으로서 뒤늦게 얻은 재미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를 기억하면 경기는 조금 더 풍성하게 남는다.
기록 확인: KBO 공식 자료
이미지 출처
- 2015년 SK와 KIA의 경기가 열린 문학야구장 — redjef25, CC BY 2.0.
- 배트와 야구 글러브 — Matt Benson, Unsplash License.
- 야구 글러브의 앞면과 뒷면 — Jeremy Kemp, Public domain.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