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을 기억할 때, 다시 마운드에 선다는 것
원년의 22연승과 부상 뒤의 복귀 사이에 놓인 긴 시간. OB에서 두산으로 이어지는 베어스의 기억 속에서 박철순이라는 이름을 돌아봅니다.
내 기억보다 먼저 시작된 이야기
박철순을 떠올릴 때는 내가 직접 기억하는 장면과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원년 우승과 22연승은 자라면서 기사와 기록, 다시 보여 주는 영상을 통해 조금씩 배운 야구의 역사에 가깝다.
그런데도 박철순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야구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특별한 이름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OB의 박철순, 불사조 박철순. 앞에 붙는 말이 달라도 같은 사람을 가리켰다. 지금 두산을 응원하는 팬들이 베어스의 옛 역사를 이야기할 때도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이름이다.
기록으로 먼저 알게 된 선수가 나중에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내게 박철순이 그렇다. 처음에는 대단한 연승을 한 투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던지기 위해 오래 버틴 선수로 기억하게 됐다. 야구를 보는 나이가 달라지면서 이름 옆에 붙는 의미도 달라진 셈이다.
스물두 번을 이어 간다는 것
1982년 박철순은 22연승을 기록했다. 그해 24승과 평균자책점 1.84를 남겼고, 정규시즌 MVP가 됐다. OB는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됐다. 짧은 문장으로 적으면 야구사의 첫 페이지에 있는 굵은 기록들이다. 하지만 한 경기씩 이어서 생각해 보면 숫자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한 번 이기기도 쉽지 않은 경기에서 다음 등판을 준비하고, 또 결과를 만들고, 그 흐름을 길게 이어 갔다는 뜻이다. 여기서 22연승을 22경기 연속 선발승이나 모두 완투한 기록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기록의 이름을 정확히 읽는 일이다. 그래야 실제로 대단했던 성취가 과장된 이야기 속에 섞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숫자를 볼 때 한 해 동안 팬들의 기대가 얼마나 커졌을지 생각한다. 처음에는 잘 던지는 투수를 응원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늘도 이어질지 기다리게 됐을 것이다. 선수가 마운드에서 만든 결과가 관중석의 다음 약속이 되는 것이다. 기록은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 선수를 기다린 사람들의 시간표이기도 하다.
원년이라는 배경도 특별하다. 프로야구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을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던 때에, 첫 우승팀과 첫 MVP의 이름이 팬들의 기억에 들어갔다. 박철순은 이미 완성된 역사에 이름을 얹은 선수가 아니라 그 역사의 시작을 함께 만든 선수였다.
불사조라는 별명의 다른 뜻
그의 커리어를 원년 성적만으로 읽으면 이후의 긴 시간을 놓치게 된다. 박철순은 여러 차례 부상을 겪었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다.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단순히 좋은 공을 던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멈춘 것처럼 보이던 시간이 끝난 뒤 다시 선수로 서는 모습을 남겼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복귀라는 말을 대체로 좋은 소식 한 줄로 읽었다. 돌아왔으니 다 나았고, 다시 던지면 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의 회복과 경기 감각, 다시 경쟁해야 하는 마음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그의 속마음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돌아왔다는 결과만으로 그 앞의 시간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든다.
1995년 OB가 두 번째 우승을 했을 때도 박철순은 그 팀의 선수였다. 1982년과 1995년 사이에는 한두 번의 시즌보다 훨씬 긴 시간이 있다. 그 두 우승을 같은 커리어 안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는다. 처음의 영광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달라진 몸과 나이로 팀의 다음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
물론 부상을 이겨 낸 선수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에게 버티라는 주문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다. 쉬어야 할 때 쉬는 일도 중요하다. 박철순의 복귀는 누군가의 고통을 참으라고 말하기 위한 사례가 아니다. 우리가 결과만 보고 지나치기 쉬운 선수의 시간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다.
우승 기록 옆에 남겨 두고 싶은 장면
박철순의 통산 기록을 펼치면 원년의 커다란 숫자가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나는 그 뒤의 시즌들을 함께 읽고 싶다. 전성기의 성적을 그대로 반복하지 못했다고 이후의 시간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선수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에는 가장 강했던 날뿐 아니라 다시 돌아온 날도 들어간다.
베어스의 영구결번 21번은 그런 여러 시간을 품고 있다. 지금의 두산 팬과 예전의 OB 팬이 같은 번호 앞에서 서로 다른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는 원년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복귀 이후의 경기를 이야기할 것이다. 기억하는 장면이 달라도 그 선수를 존중하는 마음은 만날 수 있다.
야구를 오래 보면 잘하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다. 삼진을 잡았을 때만이 아니라 마운드에 다시 오른 순간에도 박수가 나온다. 그 선수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어떤 시간이 필요했는지 조금은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박철순을 생각하면 이제 22연승과 함께 그 두 번째 박수가 떠오른다. 최고의 성적을 낸 날의 환호와, 다시 공을 던지는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다. 둘을 함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래 야구를 본 사람에게 남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기록 확인: KBO 공식 자료 1 · KBO 공식 자료 2
이미지 출처
- 2017년 잠실야구장의 야간 경기 — Cyberdoomslayer, CC BY-SA 4.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 야구 글러브의 앞면과 뒷면 — Jeremy Kemp, Public domain.
- 잠실야구장 난간에 놓인 글러브 — Hyoshin Choi, Unsplash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