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의 타구를 끝까지 보게 된 이유
상대 팀의 홈런을 걱정하던 시선이 어느 날 기록을 기다리는 시선이 됐습니다. 56홈런의 해와 삼성으로 돌아온 이승엽, 36번의 시간을 돌아봅니다.
상대 타자의 타석을 기다린다는 것
롯데를 응원하는 사람에게 삼성의 중심타선은 편한 구경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오면 주자가 없는지부터 보게 됐습니다. 같은 안타 한 개라도 그 앞에 누가 나가 있느냐에 따라 점수판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요. 타구가 떠오르는 순간에는 외야수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먼저 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는 그 타석을 걱정하면서도 찾아보게 됐습니다. 이승엽이 오늘 또 넘겼는지, 시즌 홈런이 어디까지 갔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응원팀은 그대로였지만 관심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입니다. 우리 팀과 하는 경기에서는 잡아 주길 바라면서 다른 날의 기록은 궁금해하는, 야구팬다운 모순이 생겼습니다.
모든 팬이 같은 마음이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제 기억 속 이승엽은 상대 팀이라는 울타리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타자입니다.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홈런을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평소 경기를 자세히 보지 않던 사람도 그 숫자를 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3년의 숫자는 기다림이었습니다
2003년 이승엽은 한 시즌 56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기록표에서 짧게 읽는 숫자지만 당시의 느낌은 합계보다 진행형에 가까웠습니다. 오늘 하나가 더해졌는지, 다음 경기에는 어떤 투수를 만나는지, 남은 일정은 얼마나 되는지가 이야깃거리가 됐습니다. 시즌이 끝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이 하나의 숫자를 함께 세고 있었습니다.
홈런 기록을 기다리다 보면 야구의 시간이 조금 이상해집니다. 한 타석은 몇 분이면 끝나지만 다음 기회까지는 한참 기다려야 합니다. 좋은 공 하나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잘 맞은 타구가 담장 앞에서 잡힐 수도 있습니다. 기록은 한 번의 스윙으로 늘어나지만 그 스윙을 보기 위해 보내는 시간은 길었습니다.
이승엽의 그해를 생각하면 그래서 타구뿐 아니라 타석 사이의 간격도 떠오릅니다. 결과를 모르는 채 기다렸던 시간이 기록을 추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영상을 다시 보면 결말을 알고도 시선이 끝까지 따라갑니다. 공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확인하려는 것보다, 그 순간을 기다리던 마음을 다시 만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 기록을 오늘의 타자에게 그대로 요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대마다 경기 환경이 다르고 선수도 다릅니다. 비교는 재미있지만 다른 시간을 지워 버리면 이야기가 얇아집니다. 56이라는 숫자는 누가 더 위인지 끝없이 줄을 세우는 데 쓰기보다, 그 시즌 이승엽이 얼마나 특별한 장면을 만들었는지 읽는 데 두고 싶습니다.
멀리 갔다 돌아온 중심타자
이승엽은 일본에서 여러 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습니다. 삼성에서 쌓은 명성만으로 다음 무대의 모든 일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난 선수가 다른 투수들을 만나고 자기 자리를 찾는 시간은 국내에서 보았던 홈런 행진과 또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팬이 결과만 짧게 확인할 때도 그 뒤에는 긴 시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삼성으로 돌아온 그는 2012년 한국시리즈 MVP가 됐습니다. 오래전의 기록만 추억하게 하는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시 팀의 우승 과정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수치를 그대로 반복했는지보다 돌아온 선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면 복귀의 의미가 더 잘 보입니다.
한 선수의 커리어에는 여러 번의 시작이 있습니다. 신인으로 들어오는 날과 해외에 가는 날, 익숙한 팀으로 돌아오는 날은 같은 출발선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선수도 새 환경에서는 다시 경기를 해야 합니다. 이승엽을 오직 56홈런의 타자로만 기억하면 그 뒤에 이어진 여러 시즌을 놓치게 됩니다.
기록표의 맨 끝보다 오래 남는 모습
이승엽이 KBO 리그에서 남긴 통산 홈런은 467개입니다. 일본에서의 기록을 합친 숫자와는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긴 커리어를 이야기할수록 어느 무대에서 쌓은 성적인지 정확하게 적는 일이 필요합니다. 대단한 기록에 잘못된 수식어를 더하지 않아도 그 숫자는 충분히 큰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삼성의 영구결번 36번에는 그렇게 여러 시절이 겹쳐 있습니다. 젊은 거포가 자라던 때와 큰 기록을 기다리던 해, 해외를 거쳐 돌아온 선수의 시간이 함께 있습니다. 삼성 팬에게는 자기 팀의 중심이었고, 다른 팀 팬에게도 한국 야구를 오래 보았다면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었습니다.
상대 타자의 홈런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던 저도 지금은 그 타구들을 편하게 다시 봅니다. 예전에는 우리 투수가 던진 실투부터 찾았다면 이제는 타자의 좋은 스윙도 함께 봅니다. 응원팀을 바꾸어서가 아니라 한 장면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늘어난 것입니다. 야구를 오래 본 덕분에 얻는 여유라고 해 두고 싶습니다.
이승엽의 타구를 끝까지 보게 된 이유는 멀리 날아가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공이 넘어가면 많은 사람이 함께 세던 숫자가 하나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한 선수의 기록을 리그 전체의 이야기로 기다렸던 시간, 제게 이승엽은 그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타자입니다.
이미지 출처
- 대구의 야구장 풍경 — 0xb200a9e8b2c, CC BY-SA 4.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의 이승엽 — User:STB-1, CC BY-SA 3.0.
- 배트와 야구 글러브 — Matt Benson, Unsplash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