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인생 열전

이종범이 1루에 나가면 바뀌던 풍경

안타 뒤에도 시선을 거둘 수 없던 선수. 1994년의 타격과 주루, 유격수와 외야수를 거친 이종범의 시간을 상대 팀 팬의 기억으로 돌아봅니다.

안타 하나로 끝나지 않던 타자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보통 상대 타자에게 단타를 맞으면 일단 한숨을 쉬고 다음 타자를 봅니다. 실점은 아직 아니니 병살타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종범이 1루에 나가면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게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타자가 바뀌었는데도 시선은 자꾸 주자 쪽으로 갔습니다. 공을 던지기 전부터 다른 일이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롯데를 응원하던 제게 해태의 공격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종범은 그 부담을 한 종류 더 늘리는 선수였습니다. 잘 치는 타자가 나갔다는 사실에 빠른 주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겹쳤습니다. 안타를 허용한 순간이 그 승부의 끝이 아니라 다음 장면의 시작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출루할 때마다 도루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팬의 오래된 기억은 강렬한 장면을 더 크게 남기곤 합니다. 그래도 1루에 서 있는 선수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는 감각은 분명합니다. 투수와 타자만 보던 시선을 베이스까지 넓혀 준 선수였습니다. 이종범을 기억하면 야구장이 조금 더 넓어집니다.

한 시즌에 모여 있는 서로 다른 숫자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1994년 이종범은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를 기록했습니다. 세 숫자를 차례로 읽으면 한 사람이 그 한 해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공을 자주 맞혔고 많은 안타를 만들었으며, 베이스에 나간 뒤에도 계속 다음 칸을 노렸습니다. 공격의 여러 장면이 한 선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해 정규시즌 MVP라는 결과가 따라온 것은 기록표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다만 팬으로서의 기억은 상의 이름보다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타구를 치고 달리는 모습과 베이스에서 다음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멈춰 있는 기록표를 읽는데 자꾸 움직이는 선수가 떠오르는 것은 이종범다운 일입니다.

당시 타율 4할에 가까워지는 숫자를 보던 마음과, 지금 최종 기록을 읽는 마음은 다릅니다. 그때는 앞으로 어디까지 갈지가 궁금했고 지금은 그런 시즌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0.393을 아쉽게 4할에 못 미친 숫자로만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자체로 얼마나 뛰어난 결과였는지 먼저 보게 됩니다.

도루도 단순히 발이 빠르다는 말 하나로 다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실제로 베이스를 하나 더 얻는 결과에는 출루 기회와 출발하는 순간, 상대의 대응이 함께 있습니다. 나는 그 세부를 모두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상대 팀 팬이 주자를 신경 쓰게 되는 것만으로도 공격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경기를 보며 알 수 있었습니다.

유격수였던 기억과 외야수였던 기억

2015년 야구 중계 기자간담회의 이종범

어떤 팬에게 이종범은 먼저 유격수입니다. 다른 세대의 팬에게는 외야를 지키던 모습이 더 익숙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격수로 골든글러브를 받았고 일본에서 돌아온 뒤에는 외야수로도 그 상을 받았습니다. 같은 선수의 이름을 놓고 서로 다른 수비 위치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긴 커리어의 특징입니다.

포지션이 달라졌다는 말을 기록 한 줄로 넘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타구를 바라보는 위치와 책임져야 할 공간이 달라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름만 보고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동안 선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전성기의 모습 하나만으로 커리어를 고정해 두면 이런 변화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해태의 이종범과 KIA의 이종범 사이에는 해외에서 보낸 시간도 있습니다. 팬의 기억 속에서는 장면들이 가까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해의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젊은 유격수가 그대로 마지막 시즌까지 달린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나이와 역할로 자기 야구를 이어 간 선수가 있었습니다.

7번이 불러오는 경기의 속도

야구 글러브의 앞면과 뒷면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7번을 떠올리면 저는 먼저 경기의 속도를 생각합니다. 공이 멀리 날아가지 않아도 마음이 바빠지던 야구였습니다. 타자가 1루에 도착한 뒤에도 승부가 계속되고, 투수가 잠깐 주자를 돌아보는 장면까지 의미가 생겼습니다. 이종범은 그런 부분을 보게 만드는 선수였습니다.

홈런은 한 번에 많은 것을 바꿉니다. 반면 주루의 긴장은 조금씩 쌓이기도 합니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주자가 있다는 사실, 한 번의 안타에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기대가 다음 공의 느낌을 바꿉니다. 그 결과를 숫자로 적으면 도루와 득점이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공 사이의 긴장으로 먼저 남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선수를 상대하는 것이 그저 싫었습니다. 우리 투수가 타자에게만 집중했으면 좋겠고, 출루한 주자는 다음 베이스로 가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이제는 그 불편함도 뛰어난 선수를 보았다는 기억의 한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를 어렵게 만드는 방식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이종범을 통해 배웠습니다.

야구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종범을 설명한다면 1994년 기록을 먼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설명을 거기서 끝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선수가 1루에 나가면 다음 타자만 봐서는 안 됐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의 야구는 타석이 끝난 뒤에도 계속 볼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기록·연혁 참고: 자료 1 · 자료 2 · 자료 3


이미지 출처

  1.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 Kastrot, CC BY-SA 4.0.
  2.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3. 2015년 야구 중계 기자간담회의 이종범 — acrofan.com, CC BY-SA 3.0.
  4. 야구 글러브의 앞면과 뒷면 — Jeremy Kemp,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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