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의 타석을 기다리던 저녁
아직 이대호 타석이 남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경기를 더 보게 되던 날들. 타격 7관왕과 돌아온 10번, 사직에 남은 마지막 인사를 돌아봅니다.
아직 한 번은 더 돌아오는 타순
롯데 경기를 오래 보다 보면 점수판과 함께 타순을 세는 버릇이 생깁니다. 지금 누가 나가면 누구까지 돌아오는지, 다음 이닝에 중심타선이 걸리는지 계산합니다. 지고 있는 날에는 그 계산이 조금 더 바빠집니다. 이대호가 뛰던 시절에는 마지막에 남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대호 타석이 한 번은 더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매번 해결해 준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 열 번 나와 열 번 칠 수는 없고, 중요한 순간의 범타도 팬의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타석이 다가오면 보던 일을 잠깐 멈추게 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기대가 있다는 것과 결과가 보장돼 있다는 것은 다른데, 야구팬은 그 사이에서 자꾸 다음 공을 기다립니다.
저는 이대호를 떠올릴 때 홈런 개수보다 그 기다림을 먼저 생각합니다. 경기가 답답해도 완전히 마음을 접지 못하게 하던 사람입니다. 중계를 틀어 둔 채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의 이름이 나오면 시선이 돌아갔습니다. 팀에 그런 타자가 있다는 것은 한 시즌을 응원하는 사람에게 생각보다 큰 위안입니다.
힘만 센 타자로는 설명이 모자랍니다
덩치와 홈런 때문에 이대호를 먼저 거포로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의 좋은 시절을 다시 보면 단순히 공을 멀리 보내는 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2010년에는 타율, 홈런, 타점, 득점, 안타, 출루율, 장타율까지 타격 일곱 부문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한 시즌의 기록표 여러 줄에 같은 이름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해 타율은 0.364였고 홈런은 44개였습니다. 두 숫자를 함께 보면 힘과 정확도를 따로 나누어 생각하던 습관이 조금 흐려집니다. 홈런만 기다리는 타자가 아니라 안타를 치고 출루하면서 공격의 중심에 서 있던 선수였습니다. 큰 타구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결과로 타선을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롯데 팬에게는 그 기록이 반갑고도 아쉬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개인의 대단한 시즌이 우리가 바라던 팀의 마지막 결과까지 자동으로 데려다주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팀의 아쉬움을 이유로 선수의 성취까지 작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야구에서는 한 사람의 훌륭한 해와 팀을 응원하는 마음의 미련이 같이 남을 수 있습니다.
다른 유니폼을 입어도 찾아보게 된 이름
이대호는 일본과 미국 무대에서도 뛰었습니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처럼 매 경기 같은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소식이 들리면 자연스럽게 결과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우리 팀 선수가 아니라는 말만으로 관심이 끊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래 기다려 본 타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외 진출을 한 문장으로 쓰면 새로운 도전입니다. 그러나 선수가 실제로 지나간 시간은 그보다 길었을 것입니다. 구장과 상대 투수, 함께 뛰는 동료가 달라지는 곳에서 다시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국내에서 익숙했던 평가가 다른 리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팬으로서는 결과를 쉽게 말하면서도 그 차이는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롯데로 돌아온 모습을 보았을 때는 반가움과 기대가 함께 왔습니다. 익숙한 타자가 다시 우리 타순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만 돌아왔다는 말이 시간을 되돌린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선수도 팬도 나이를 먹었고, 팀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장면을 그대로 다시 볼 수는 없어도 새로운 시즌을 함께 기다릴 수는 있었습니다.
오래 응원한 선수에게는 그런 감정이 생깁니다. 전성기의 모습만 보여 주었으면 하는 욕심과, 지금의 나이로 자기 경기를 이어 가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같이 있습니다. 팬도 선수와 함께 시간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이대호의 후반기 커리어를 떠올리면 그래서 기록만큼 돌아온 유니폼의 느낌이 남습니다.
타석에서 내려온 뒤에도 남은 10번
2022년 10월 8일 사직에서 이대호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 인사를 했고, 롯데의 10번은 영구결번이 됐습니다. 날짜를 적으면 하루의 행사이지만 팬에게는 오랫동안 반복해 온 습관을 정리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시즌 타순을 생각할 때 더는 당연하게 그의 이름을 넣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은퇴한 선수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가장 잘했던 경기만 다시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별한 기록이 없던 평범한 저녁에도 그가 타석에 있었던 풍경을 그리워하는 일입니다. 경기를 켜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는 선수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또렷해지기도 합니다.
사직에 남은 10번은 그런 시간을 모아 둔 숫자처럼 느껴집니다. 기록을 모르는 어린 팬에게는 처음부터 구장에 걸려 있던 번호일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왜 저 번호는 아무도 달지 않는지 묻는다면, 저는 타격 7관왕 이야기도 하겠지만 타순을 기다리던 얘기를 먼저 할 것 같습니다. 지는 경기에서도 한 번 더 보게 하던 타자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롯데의 다음 타자를 기다리면서도 가끔 예전의 감각이 떠오릅니다. 아직 그 선수 타석이 남았다는 생각으로 버티던 저녁들입니다. 이대호는 많은 홈런과 좋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제게는 거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야구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도 다음 타석을 기다리게 해 주었던 시간입니다.
이미지 출처
- 사직야구장의 관중석과 그라운드 — Cheolstar, CC BY-SA 3.0.
- 배트와 야구 글러브 — Matt Benson, Unsplash License.
-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의 이대호 — User:STB-1, CC BY-SA 3.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