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철의 기록에는 길게 이어진 이닝이 있습니다
1992년의 출발, 1997년 노히트노런, 다시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린 2007년. 정민철의 마운드를 한 경기보다 긴 시간으로 돌아봅니다.
선발 이름을 보고 경기의 무게를 짐작하던 때
오래 야구를 보다 보면 상대 선발 이름을 확인하고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날이 있습니다. 정민철이라는 이름도 그랬습니다. 쉽게 점수를 내기 어려울 것 같고, 초반 기회를 놓치면 경기가 길게 답답해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처럼 여러 지표를 살펴보지 못하던 때에도 믿고 공을 맡기는 투수가 누구인지는 자연스럽게 느끼곤 했습니다.
정민철은 1992년 빙그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해부터 14승을 올렸고 195와 3분의 2이닝을 던졌습니다. 어린 투수가 팀에서 얼마나 큰 몫을 맡았는지 보여 주는 출발입니다. 다만 그 시절의 많은 이닝을 지금 모든 신인에게 바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투수 운용과 시대의 환경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빙그레에서 한화로 팀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그의 마운드는 이어졌습니다. 타자들의 이름으로 먼저 기억하는 구단에도 긴 시즌을 지탱한 투수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글스의 옛 야구를 돌아볼 때 정민철을 따라가면 그 다른 한쪽이 보입니다. 공격이 잘 풀리는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에도 누군가는 아웃을 잡아야 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았다는 말로 줄일 수 없는 경기
1997년 5월 23일, 정민철은 대전에서 OB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습니다.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낫아웃 출루가 있어 퍼펙트게임은 아니었습니다. 야구 기록에 익숙하지 않으면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안타가 없다는 것과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기를 이야기할 때면 아깝다는 말이 자주 따라옵니다. 물론 더 드문 기록에 가까이 갔다는 점은 눈길을 끕니다. 그래도 저는 이루지 못한 것만 앞에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상대에게 안타를 하나도 주지 않은 아홉 이닝이 있었습니다. 기록의 마지막 이름이 달라졌다고 그 공들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 타자가 한 명 나갔다는 사실과 경기를 끝까지 지켜 냈다는 사실을 함께 보면 장면이 다르게 읽힙니다. 아쉬움이 생긴 뒤에도 남은 아웃은 직접 잡아야 했습니다. 오래된 기록을 볼 때 이제는 완벽한 결말뿐 아니라 그 결말에 닿기까지 경기를 이어 간 모습에도 관심이 갑니다. 정민철의 그날은 충분히 오래 기억할 경기였습니다.
강했던 시절과 다시 버틴 시절 사이
정민철은 데뷔한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여덟 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습니다. 1999년에는 개인 한 시즌 최다인 18승을 거뒀습니다. 한 번 유난히 좋았던 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팀이 기대할 수 있는 투수였다는 점이 보입니다. 통산 기록을 만들어 가는 방식에도 이런 꾸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즌별 기록을 끝까지 내려가면 좋은 숫자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2004년에는 승리 없이 6패를 기록했습니다. 한때 확실했던 선수도 기대한 만큼 공을 던지지 못하는 시기가 옵니다. 그해 한 줄을 보고 이전의 투수가 전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남아 있는 선수의 시간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2007년 정민철은 다시 12승과 평균자책점 2.90을 남겼습니다. 젊은 시절의 등판표와 나란히 두면 같은 사람의 다른 계절이 보입니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어야만 좋은 시즌인 것은 아닙니다. 긴 커리어에서 다시 자기 몫을 해냈다는 사실은 첫 전성기와 별개의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의 기록을 보고 내일의 선수를 단정하는 일이 얼마나 빠른지 생각하게 됩니다. 좋을 때는 앞으로도 늘 좋을 것 같고, 나쁠 때는 더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민철의 여러 시즌을 연결해 보면 그 사이에 우리가 놓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 경기의 하이라이트보다 기록표 전체를 천천히 읽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
23번이 남긴 투수의 시간
KBO 통산 161승, 2,394와 3분의 2이닝, 1,661탈삼진. 정민철의 기록에서 제 눈이 오래 머무는 곳은 이닝입니다. 한 이닝마다 세 개의 아웃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타자를 만났습니다. 단순히 오래 소속 명단에 있었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실제 경기에서 공을 맡아 처리한 시간이 숫자로 남아 있습니다.
한화의 영구결번 23번은 그 많은 날을 하나의 번호로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 야구를 보기 시작한 팬이라면 해설이나 다른 자리에서 만난 얼굴이 먼저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얼굴의 선수 시절을 찾아보면 젊은 날의 강한 공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지나 다시 마운드에 선 기록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인생을 읽는 자료로 충분합니다.
저는 정민철을 그저 노히트노런을 한 투수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하루를 가능하게 한 능력과 그 앞뒤로 이어진 등판을 같이 생각하고 싶습니다. 큰 기록 하나가 선수를 소개할 수는 있어도, 그 선수가 보낸 시간을 전부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23번을 떠올리면 특별한 하루와 평범한 등판일들이 함께 돌아옵니다.
기록 참고: KBO 공식 기록 · 관련 보도 2 · 관련 보도 3
이미지 출처
- 한화가 이전 홈으로 사용했던 대전 한밭야구장 — ko:User:Prister, CC BY-SA 3.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 2015년 야구 중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정민철 — acrofan.com, CC BY-SA 3.0.
- 2025년 개장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 Seohae1999,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