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자리
1984년의 네 번의 승리보다 먼저 떠오르는 이름. 롯데 팬의 어린 기억과 어른이 된 뒤 읽은 기록 사이에서 최동원을 다시 생각합니다.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었다
야구를 오래 보다 보면 이름만으로도 그 시절의 분위기가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롯데 팬에게 최동원은 그런 이름이다. 오래된 경기 영상을 보면 유니폼도, 중계 화면도, 관중석 풍경도 지금과 다르다. 그런데 마운드에 그가 서 있으면 화면 속 시간이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에 남은 장면과 나중에 여러 번 본 영상이 겹쳐져 하나의 기억이 된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투수의 이닝이나 평균자책점을 따져 가며 야구를 보지 않았다. 누가 나오면 마음이 놓이는지, 누가 공을 던질 때 경기를 계속 보게 되는지 정도를 알았다.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었다. 어린 팬에게는 그 말이면 설명이 끝났다. 복잡한 기록을 몰라도 우리 팀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십을 넘겨 그 이름을 다시 생각하면, 선수 한 명이 지역과 팀의 기억을 얼마나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우승 횟수를 세기 전에 얼굴이 떠오르고, 숫자를 읽기 전에 투구 동작이 떠오른다. 그래서 최동원 이야기는 기록에서 시작해도 결국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 쪽으로 돌아온다.
네 번의 승리를 나중에 이해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가 거둔 네 번의 승리는 모두 최동원의 승리였다. 어린 눈에는 그저 중요한 날이면 그가 나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 기록을 다시 읽으니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시리즈에서 한 번 이기는 일도 쉽지 않은데, 우승에 필요한 네 번을 한 투수가 가져왔다는 이야기다.
그해 정규시즌에도 그는 27승을 기록했고 MVP를 받았다. 지금의 투수 운용과 단순히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에는 시대가 많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숫자를 오늘의 투수에게 요구할 기준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시 롯데가 어떤 투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으로 읽게 된다.
1984년의 마지막 장면에는 유두열의 홈런도 있다. 야구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최동원의 네 번의 승리를 기억하면서도 그 곁의 타자와 수비, 끝까지 버틴 동료들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한 사람의 강렬한 이름이 팀 전체의 시간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의 기록은 성적표 한 칸보다 훨씬 크다.
대단하다는 말 옆에 남는 마음
젊을 때는 그런 투수를 보면 강하다는 생각부터 했다. 많이 던지고 또 나와서 이기는 모습이 그저 멋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보는 곳이 조금 달라진다. 그 많은 공을 던진 몸은 어땠을까.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에도 다음 등판을 기다려야 했던 마음은 어땠을까. 기록에는 적혀 있지 않은 질문들이 생긴다.
그렇다고 당시의 경기들을 오늘의 기준으로 간단히 재단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응원과 지금 느끼는 걱정은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위대한 성취를 존중하는 일과 그 성취를 만든 사람의 부담을 생각하는 일도 함께 할 수 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둘을 나누기 어렵다.
야구팬은 가끔 선수를 너무 쉽게 숫자로 바꾼다. 몇 승, 몇 이닝, 몇 번의 우승. 나도 그렇다. 하지만 최동원의 기록 앞에서는 숫자를 다 읽고도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그 숫자를 만들어 낸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무쇠팔이라는 별명은 강인함을 말하지만, 결국 그 팔도 사람의 팔이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더 오래 남는다.
기록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같은 희생을 다음 선수에게 바라지는 않게 됐다. 내가 어릴 때 품었던 감탄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 감탄 옆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오래 야구를 보았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다르게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등번호가 기억을 대신할 때
롯데의 11번을 보면 지금도 최동원이 먼저 떠오른다. 영구결번이라는 것은 숫자 하나를 비워 두는 제도이지만, 팬에게는 그 자리를 계속 기억하겠다는 약속처럼 보인다. 선수는 더 이상 경기에 나오지 않아도 이름을 부를 자리가 남는다. 새로 야구를 보기 시작한 사람은 왜 그 번호를 쓰지 않는지 묻게 되고, 오래 본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당시의 모든 경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날의 기억에는 빈칸이 많고, 나중에 알게 된 기록도 섞여 있다. 그래도 롯데에 최동원이 있다는 말이 주던 든든함은 이해할 수 있다. 기록을 외우는 것과 선수를 기억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일이다.
한 해가 끝나면 우승팀이 정해지고, 또 다음 시즌이 시작된다. 그 사이에 수많은 선수의 이름이 지나간다. 그런데 어떤 이름은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도 지워지지 않는다. 최동원은 내게 그런 선수다. 잘 던졌다는 말만으로는 조금 모자라고, 위대했다는 말만으로는 조금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문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었다. 오래된 영상 속 마운드를 보고 있으면 지금도 그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팬이 품었던 믿음과 나이 든 팬이 읽는 기록이 그 이름에서 만난다.
기록 확인: KBO 공식 자료
이미지 출처
- 사직야구장의 관중석과 그라운드 — Cheolstar, CC BY-SA 3.0.
- 최동원의 롯데 영구결번 11번 도안 — Nudimmud, CC BY 3.0.
- 그라운드 위의 야구공 — Mark Tegethoff, Unsplash License.
- 최동원을 추모하는 11번이 새겨진 사직야구장 그라운드 — 히히히, CC BY-SA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