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터의 롯데, 그리고 늘 무서웠던 김성근의 SK
롯데의 다음 타석은 기다려졌고, SK의 다음 수는 걱정됐다. NO FEAR로 돌아온 롯데팬이 기억하는 김성근 감독과 2000년대 후반 SK의 단단한 야구.
로이스터 시절의 롯데를 생각하면 먼저 신나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방망이가 터지고, 사직이 들썩이고, 다음 타자가 또 기대되던 야구.
그런데 그 기억 옆에는 꼭 한 팀이 붙어 있다.
김성근 감독의 SK 와이번스.
다시 야구가 재미있어졌는데, 저 팀을 만나는 날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가 제법 잘한다고 생각하다가도 SK와 붙으면 아직 할 일이 많구나 싶었다.
롯데 팬에게 반가운 팀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오래 남았다.
우리는 이제 겁먹지 않기로 했는데
2008년 로이스터가 왔을 때 롯데는 오래 움츠러들어 있던 팀이었다.
8888577을 지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상대가 강하면 경기 전부터 마음 한구석을 접어놓곤 했다.
그때 들려온 말이 NO FEAR였다.
두려워하지 말자.
팬인 나도 그 말이 좋았다. 자기 타석에서 시원하게 돌리는 야구를 보면서 나까지 조금 펴지는 기분이었다.
이대호가 있고, 조성환이 있고, 가르시아가 있었다. 강민호의 방망이도 기대됐다. 우리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SK는 우리가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사정을 별로 봐주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겁먹지 않기로 했는데, 저쪽은 계속 겁이 났다.
김성근의 SK는 한 점부터 불편했다
내 기억 속 SK는 큰 것 하나만 조심하면 되는 팀이 아니었다.
주자가 나가면 그때부터 신경이 쓰였다.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것, 공 하나에 움직이는 것, 수비가 잠깐 빈 곳을 건드리는 것까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 쪽이 바빠져 있었다.
롯데의 타순을 볼 때는 이번에 한 방 나오겠지 싶었다.
SK의 주자를 볼 때는 이번에 또 뭘 하려나 싶었다.
그 차이가 컸다.
그 팀에는 자기 차례에 해야 할 일을 아는 선수들이 많아 보였다. 앞사람이 만들어놓은 작은 틈을 뒷사람이 이어받는 느낌이었다.
한 점을 먼저 주면 그냥 한 점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점수를 따라가려고 한참 애를 쓰는데, 저쪽은 투수를 바꾸고 수비를 다잡으며 경기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 같았다. 남은 이닝이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그때는 답답해서 야구를 참 피곤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곤했던 쪽은 상대 팬인 나였다.
선발이 내려가도 안심이 안 됐다
김광현이 나오면 시작부터 부담스러웠다. 채병용 같은 투수도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발만 버티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투수가 바뀌었으니 이제 좀 쳐보나 싶으면 또 다른 공이 나왔다. 경기 흐름과 타자에 따라 마운드를 이어가는, 이른바 벌떼 야구였다.
정대현의 낮게 들어오는 공도 그 기억에 남아 있다. 포수 자리에는 박경완이 있었다. 타자만 공을 보는 게 아니라 저 포수까지 함께 상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격에서는 정근우가 성가셨고, 최정이 무서웠다. 외야에는 김강민과 조동화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잘 맞았다고 일어설 준비를 하다가 다시 앉게 되는 팀이었다.
물론 SK도 실수했고, 롯데도 이겼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은 건 빈틈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조금만 흔들리면 점수가 나는데, 저쪽이 흔들릴 때는 그 틈을 끝까지 잡기가 어려웠다.
강한 타자 한 명은 타석이 끝나면 잠시 잊을 수 있다.
강한 팀은 수비할 때도 공격할 때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5승 13패,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옛날 기억은 좋아하는 쪽으로 부풀기도 하고, 싫었던 쪽으로 더 기울기도 한다.
그래서 기록을 다시 봤다.
2008년 롯데는 SK를 상대로 5승 13패였다.
그해 롯데가 정규시즌 3위로 올라갔는데도 SK전은 그랬다. 내가 괜히 무서워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 7월 경기 기사에는 이대호와 가르시아가 홈런을 치고도, SK가 투수 여덟 명을 투입하고 마지막에는 스퀴즈로 승부를 가져간 이야기가 남아 있다.
기사를 읽으니 그 시절의 답답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시원하게 쳤는데, 경기는 저쪽이 가져가는 날.
롯데 야구가 재미있다는 것과 SK를 이긴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SK는 2007년과 2008년에 연달아 한국시리즈를 우승했다. 2009년에는 KIA와 7차전까지 가서 준우승했고, 2010년에는 다시 정상에 올랐다.
한두 번 우리를 괴롭힌 팀이 아니었다. 다른 팀들도 넘어야 했던 벽이었다.
우리는 가을에 다시 야구한다는 사실이 반가웠는데, 저 팀은 가을의 마지막까지 남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간격이 참 멀게 느껴졌다.
좋아했던 야구와 인정할 수밖에 없던 야구
로이스터와 김성근, 누구의 야구가 정답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로이스터에게도 준비와 판단이 있었고, 김성근의 SK 선수들도 상황을 읽고 스스로 움직였을 것이다.
다만 팬으로서 받은 느낌은 분명히 달랐다.
로이스터는 롯데 야구를 다시 기다리게 했다. 김성근의 SK는 그렇게 기다리던 경기에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했다.
나는 롯데가 좋았다. 그러니 로이스터의 야구에 더 마음이 갔다.
그래도 SK가 강했다는 사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안 좋아한다고 약한 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싫은 소리가 많이 나올수록 이기기 어려운 상대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니 그 SK도 그 시절 야구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사직이 들썩이던 날들만 기억하면 이야기가 반쪽이다. 잘 치던 우리 타선을 막아내고, 작은 틈으로 점수를 만들고, 끝내 이겨버리던 상대도 있었다.
그 팀을 이기는 날이 유난히 좋았던 이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롯데를 응원할 것이다. 또 로이스터의 NO FEAR에 설레고, 다음 타석을 기다릴 것이다.
다만 일정표는 한번 보게 될 것 같다.
이번 주에 SK 만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