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한국 프로야구
제대와 취업, 결혼과 첫아이, 거제로 돌아온 시간. 야구를 못 본 사이 지나간 8888577, 그리고 다시 경기를 기다리게 한 로이스터의 NO FEAR.
90년대 마지막에 나는 군대에서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를 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다음 야구도 당연히 챙겨 볼 줄 알았다.
그런데 2000년대가 되니 야구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자꾸 생겼다.
제대, 졸업, 취업, 결혼, 첫째 아이의 탄생.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거제도로 돌아오는 일까지.
적어놓으면 몇 줄 안 되는데, 저 일을 하나씩 겪는 동안 야구는 내 생활에서 꽤 멀어졌다.
야구보다 내 인생이 바빴다
80년대에는 학교 갔다 와서 TV를 켰고, 90년대에는 선수 이름도 외우고 순위도 챙겼다. 그런데 2000년대의 나는 내 앞에 놓인 일을 따라가기에도 바빴다.
제대하고 나니 졸업이 있었고, 졸업하고 나니 취업이 있었다. 취업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을 했고, 첫째가 태어났고, 이제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인생이 아니었다.
하나를 마치면 좀 한가해질 줄 알았는데,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롯데의 다음 선발보다 내 다음 일정이 더 급했다.
야구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응원팀을 바꾼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 롯데를 안 보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야구를 거의 못 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경기보다 내 일이 먼저 떠오른다. 어느 해에 누가 몇 승을 했는지보다, 그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팬이라고 해서 평생 같은 열심으로 야구를 보는 건 아닌 모양이다.
살다 보면 야구가 조금 뒤로 밀리는 때도 있다.
그런데, 안 본 게 다행이었을지도
지금 돌아보면 묘하게 위로가 되는 구석이 있다.
내가 그렇게 바쁘게 살던 동안 롯데는 그 유명한 8888577을 지나고 있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순위다.
8위, 8위, 8위, 8위, 5위, 7위, 7위.
여덟 팀이 야구하던 시절이다. 앞의 8 네 개는 그냥 숫자 네 개가 아니다. 꼴찌를 네 번 했다는 이야기다. 중간의 5가 괜히 반갑게 보일 정도니 나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걸 매년 처음부터 끝까지 봤으면 어땠을까.
제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저 순위까지 매일 확인했으면 마음이 꽤 바빴을 것 같다. 내 생활도 정신없는데 롯데까지 저러고 있었으니.
그러니 조금 못 본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 시절을 계속 지켜본 팬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나는 사느라 바쁘다는 이유라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저 일곱 자리를 한 해씩 직접 겪었다.
일곱 자리 숫자는 금방 읽힌다.
그걸 기다린 시간은 일곱 해다.
지금은 웃으면서 비밀번호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봄마다 올해는 좀 다르겠지 했을 것이다. 롯데 팬이 원래 그렇다. 지난 시즌에 무슨 일이 있었든 봄이 되면 조금씩 마음이 풀린다.
거제로 돌아와서
그 사이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거제도로 돌아왔다.
귀향이라고 쓰면 뭔가 근사한 결정처럼 보이지만, 고향에 돌아왔다고 생활이 저절로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가족과 어떤 일상을 만들어 갈지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다시 야구를 볼 여유가 생겼다.
이상한 건 오래 못 봤다고 응원팀까지 낯설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선수들은 달라졌어도 롯데가 이기면 좋고 지면 기분이 별로인 건 그대로였다.
한동안 연락 못 한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생각보다 금방 예전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그 사이 군인이었다가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 됐고, 남편이 됐고, 아버지가 됐다.
사는 곳도 바뀌었다.
그런데 응원팀은 안 바뀌었다.
이 정도면 내가 정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로이스터, NO FEAR
2008년, 롯데에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왔다.
그리고 NO FEAR.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말이 롯데 야구와 붙었다.
나는 감독의 전술을 세세하게 분석하던 사람은 아니다. 어떤 작전이 얼마나 바뀌었고 훈련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줄줄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시 보기 시작한 롯데는 분명 전과 느낌이 달랐다.
경기가 기다려졌다.
잘하는 선수가 보였고, 타순이 돌아오면 기대가 됐고, 질까 봐 마음부터 접어두기보다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게 로이스터 야구는 그런 기억이다.
이대호, 조성환, 강민호, 가르시아.
이름을 다시 챙겨 보고, 타석을 기다리고, 롯데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바빠서 멀어졌던 야구가 그렇게 생활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2008년 롯데는 정규시즌 3위를 했고, 8년 만에 가을야구로 돌아갔다.
우승은 아니었다.
그래도 8888577 다음에 오는 3은 그냥 3이 아니었다. 봄에만 잠깐 기대하다 마는 야구가 아니라, 가을까지 기다려 볼 야구가 됐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확한 경기 결과보다 다시 야구가 재미있어졌다는 감각이 먼저 남는다.
제대하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거제로 돌아왔다. 내 인생이 그렇게 한참 바뀌는 동안 롯데는 아래쪽에서 오래 버텼다.
그리고 내가 조금 숨을 돌릴 무렵, 롯데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야구는 그렇게 비어 있다가, NO FEAR라는 말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야구를 못 본 건 아쉽다.
8888577을 덜 본 건 다행이다.
로이스터 야구를 본 건, 참 다행이었다.